이 기행문은 1995년 3월에 있었던 북한 (NK)에서의여행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참가자는 호주의 컴퓨터 과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폴, 보스니아에서 얼마전에 돌아온 네덜란드 유엔 병사인 어윈, 그리고 현재는 아프리카에 주재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 관리자인 릭 등이었다. 이 여행팀은 네덜란드의 VNC Travel of Utrecht (VNC.Travel @inter.nl.net)에서 주선했다. 북한에서의 일주일간 비용은 일인당 미화 900달러정도였으며, 이는 베이징에서 평양까지의 밤기차와 두명의 안내원, 소형버스, 숙박, 관광, 그리고 하루 세끼의 식사 가 포함된 가격이다. 하지만 베이징까지는 자기가 알아서 가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들이 그 좋은 휴가를 하필 북한같이 고립되고 후진 나라에서 보낼 생각 을 했는가하고 의아해 했다. 나와 릭은 공산주의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나 단지 그것만이 북한을 여행하게 된 동기는 아니었으며 그럴만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 적은 비용으로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에 있어 공산주의 국가는 지극히 싼 가격(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모스크바 그리고 발틱제국에 대한 기행문도 보라)에 귀빈 대접 을 받을 수 있을뿐 아니라 기이한 음식들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과 문화를 접해볼 수 있으며, 덤으로 20세기의 거대한 - 그러나 필연적으로 망할 운명의 - 이념운동의 현장, 즉 스탈린주의를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마치 구소련의 50년전 모습과 같은 나라로서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인데 1945년으로 간 것인지 1984년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여러 명의 여행자들이 단체를 구성해야만 했던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났으 며 86년부터는 개인도 비교적 자유로이 북한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북한방문도 쉽게 성사될 수 있었다. 홀홀단신 북한을 여행한다해도 안내자와 차량을 제공받게 되는데 이것이 북한에서 의무사항인 지는 모르나 어쨌든 이 나라와 같이 관련정보를 구하기가 어려운 나라를 여행하려면 안내원을 동 반하는 것이 여행을 수월하게 하는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기차안에서 우리가 유일한 서양인이라는 것을 알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요청했었는데도 우리중 아무도 북한에 다녀왔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믿음직한 Lonely Planet(여행 가이드북)조차 기차여행 시간을 실제와 8시간이나 차이가 나도록 적어놓았을 정도였다. (하긴 그 지침서라는 것도 89년 북한을 방문했던 단 한명의 여행자의 경험담을 근거로 짧게 작성한 것이었다) 우리는 곧 옆 객실에서 몇몇 북한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영어 실력은 형편 없었으며 'tourist (관광객)' 라는 영어 단어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매우 친절했으나 보통 서양인들이 보면 자칫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오해 할 정도로 친밀감의 표현이 심했다.
밤새 기차에 몸을 싣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거대한 강가의 다리 앞에 다다랐는데 이곳이 중국 -북한간 국경이었다. 기차에서부터 벌써 여러가지 슬로건과 포스터,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의 초 상화가 곳곳에 보였다. 북한측 세관원들은 내가 지금까지 공산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마주쳤던 무뚝뚝한 사람들은 아니 었으며 느긋하게 우리들이 가져온 서양 잡지들을 뒤적여 보면서 자동차와 벌거벗은 여자사진 등 그들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에서는 한참 동안을 바라보곤 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온 지도나 책, 잡지들이 혹시 남한에서 발행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검사 가 워낙 철저해서 남한 것이라면 바늘이라도 찾아낼 듯이 보였으며 라디오 또한 절대 반입금지 품목이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으며 사람들에 떠밀려 비몽사몽 간에 기차 밖 으로 밀려 나왔다. 콘크리트 투성이의 플랫폼 밖에는 벤츠 여러 대가 정렬해 있었으며 역내에는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안내원이 주변에서 유일한 서양인들인 우리 일행을 곧 발견하고는 달려와 고위 관리나 귀빈들이나 드나듬직한 통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호텔로 향하는 도중 나는 다소간 상상했던 평양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으 며 오래된 볼보와 벤츠, 그리고 여러가지의 낡은 일제 중고차들은 동구 국가들 방문시 보았던 것 들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이었는데 안내원에게 이 말을 하자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자기들도 이제 곧 자동차를 자체 생산할 단계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가격 문제를 제외하고는 개인이 자동차를 소유하는데 어떤 제한은 없다했으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려웠으며, 아마도 가치없는 북한 화폐를 달러로 바꾸기 어려운 사실 하나 만으로도 북한 자동차들이 드물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먼저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3백m 이상 되어 보이는 피라미드형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우 리는 이 거대한 구조물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더욱 놀랐는데, 우리 안내원은 이 건물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105 빌딩'이라 불렀다. 완성되면 세계에 서 가장 높은 호텔이 될 것이며 그러면 평양은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안내원은 이 건물 공사가 8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으나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물의 완성까 지는 요원한 상태였으며, 후에 서방의 전문가들(그리고 남한의)이 이 건물의 안전도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이 건물 가까이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묵을 '해방산'호텔이 C 급 호텔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실망했다. 하지만 아침일 찍에 더운 물이 부족하다는 것과 우리같은 서양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기에 문 천장이 너무 낮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우리 일행의 방 중 하나에는 TV 도 있었는데 2개의 채널 (일요일은 3개)이 있었으며 밤 10 시경에 일찍 방송이 종료되었으나 어차피 방송내용이 선전일색의 국영방송으로 '재미' 가 없어 별 로 아쉽지도 않았다. 대부분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거나 '위대한 지도자 동지' 를 주제 로 한 다큐멘터리 (흥분되고 감격한 아나운서 목소리), 그리고 군악대의 군가연주 등이었다.
안내원은 우리를 어두침침한 지하식당으로 안내해주고 우리끼리 식사를 하게 내버려둔 채 가 버렸는데 그 후에도 북한 체류기간중 내내 식사시간은 우리가 안내원과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유 일한 '우리들' 만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이용해 웃고 이야기하며 북한에 대한 험담도 마음놓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은 북한이 삭량 부족에 곤란을 겪고 있는 국가라는 점 을 감안하면 그런대로 만족할만한 수준이었는데 매번 밥, 국, 닭, 쇠고기, 매운탕 등과 함께 6가지 이상의 반찬이 꼬박꼬박 나왔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안내원과도 더 친해질 겸 위층에 있는 바에 올라갔다. 첫 번째 안내원 은 31세 였으나 담배를 워낙 피워대 겉보기에는 42세는 되어보였다. 그도 영어를 곧잘 했으나 두 번째 안내원만은 못했는데 두 번째 안내원은 관광학을 전공한 28세의 청년이었으며 외국 방 문 경험은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안내원에게 평양의 범거리를 산책해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우리가 자유로이 거리를 돌 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러나 길을 잃을 염려도 있고하니 거리 설명도 해줄 겸 자신 이 동행을 하겠다고 굳이 고집했다. 거리는 춥고 어두웠으며 단지 큰 건물위에 구호를 적은 네온사인만이 보일 뿐이었고 서양상품 광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다녀본 지구상 그 어떤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광이었 다. 얼마를 걷자 곧 김일성 광장이 나왔다. '위대한 지도자' 는 물론 마르크스와 레닌의 미소진 모습이 네온 불빛을 받으며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으며 우리 일행과 몇몇 롤러스케이팅을 즐기 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시간 거리에 자동차는 한 대도 없었다.
광장에서 강을 건너면 '주체탑' 이 서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자립이념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들이 '주체'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실상 한국전을 시작으로 소련 동구제국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북한은 끊임없이 중국과 소련의 간섭을 받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가 무 너진 지금이야말로 비로소 북한이 -명목상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서 - 그들이 '주체' 사상을 진정으로 시험해 볼 수 있게 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좋지않은 상황의 조짐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었다. 석탄을 이용한 발전으로 인해 공 기는 오염돼 가고 있고 과거 금지되었던 자전거가 평양 거리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평양을 나선 시골에서는 촛불만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박물관에서는 전시관을 지날 때마다 지나간 방안 절전을 위해 불을 꺼야만 했다.
평양 근교에 있는 김일성 생가에서 현지 안내원에게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김정일)가 사실 은 백두산이 아닌 구소련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서방에서 읽었었다)" 고 묻자 그는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라며 몹시 화를 냈다. 평양으로 돌아와 파리 개선문보다 3 m 나 더 높은 '승리문' 앞에서 우리는 일단의 학생들이 집단체조하는 것을 목격하고 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안내원은 거것이 곧 다가올 축제 를 준비하는 것이라 했으나 가는 곳마다 예외없이 하루종일 학생들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의아했다. 에너지 위기는 듣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
티타늄 지붕까지 구비되어 있는 '5.1 경기장' 에 가는 도중 양복과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맨손 으로 돌을 나르고 있는 공사현장을 목격했다. 안내원은 이 공사가 평양의 중심부를 가르는 다리 를 만다는 것이며 김정일이 1년안에 공사를 끝내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각자 가능한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이를 돕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실제로 우리 안내원중 한 명은 그곳에서 직접 돌을 나르기도 하였다.
이날 일정의 백미는 인민군 서커스단 방문이었다. 원기둥 형태의 거대한 대리석 건물 안에 들 어서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우리들 -서양인- 을 보기위해 고개를 돌렸다. 동구지역의 서커 스단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훌륭한 서커스단을 가지고 있었다. 말과 권투하 는 곰 그리고 강아지 등 온갖 동물묘기가 볼만했으며 남한 군인과 미군 복장(금발, 선글래스, 큰코, 거만한 걸음걸이까지 완벽한)을 우스꽝스럽게 차려입은 광대들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북한의 선전기관들은 남한을 미제의 압제하에 신음하는 형제국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과장되게) 몇번씩이나 한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이 어떤 공작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통일은 북한에서 큰 얘깃거리인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는 계속 금세기내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많은 서방 전문가들이 그에 동의하지만 그가 꿈꾸는 방식은 아니다.
북한 시골 풍경은 대체로 갈색 이미지에 동산들이 많은 호주 내륙이나 캘리포니아 중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을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붉은 글씨의 구호들이 산중턱에 놓여 있었다.
휴전선 쌍방 2㎞ 에 달하는 비무장지대 답사가 기대에 못 미쳤던 이유는 안내원들이 군사시설 물 주위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두 개의 거대한 깃발과 북측 선전 스 피커에서 나오는 큰 소리의 음악을 들었다. 판문점은 매우 흥미로운 곳이었다. 문자 그대로 남 한과 북한 군인들이 담장도 없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각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날 남 측 관광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측 설명에 의하면 남한측에서 판문점 관광을 위해서는 방문 훨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하 고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내야하며 운동화나 청바지 착용이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한 병사가 우리를 안내했는데, 그는 휴전선 양쪽 모두에 반씩 걸쳐 있는 일곱개의 건물중 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을 나오면서 "내가 만일 판문점에서 남측으로 걸어들어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안내원은 "미군이 당신을 쏘아 죽일 것" 이라고 말했다.
북한군인 안내원은 그들이 세계 5위의 군사력을 가지고 1백만 대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 실을 부인했다.
1인당 20달러로 값을 흥정하고 안내원을 따라 보신탕을 먹으러 나섰다. 북한인들은 개를 애완 동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개들은 농장에서 노동력으로, 식당에서 음식으로 사용될 뿐 개인 적으로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매우 귀해서 심지어 동물원에서조차 20여종 의 개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북한인들은 중국인들이 거북이를 비싼 건강식으로 생각하듯이 개를 취급했다. 옛말에 따르면 일 년에 개한마리를 먹으면 건강을 지켜주고, 겨울에 외투한장을 더 입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7시께 우리는 어두운 통일로를 달렸는데 교외는 고층건물들이 많았으나 불이 켜있 는 곳은 거의 없었다. 안내원에게 그 이유를 묻자 토요일 저녁이기 때문에 모두를 친척들을 방 문하기 위해 집을 비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층건물이 있는 교외지역은 평양 중심부와 넓 은 대로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큰 것은 왕복 13차선이나 되는 곳도 있을 정도였으나 빌딩 근처에 주차장이 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콘크리트 건물군' 한중간에 우리가 타고 가던 차가 멈추고,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나즈막한 건물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약간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보신탕집, 가라오케, 술집 이 함께 붙어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천장에는 서양의 디스코텍에서 볼 수 있는 둥근 사이키 조명 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가라오케 기계에는 영웅을 찬미하는 북한 음악밖에 들을 수 없는 등 내가 이 세상에서 가본 곳 중 가장 별난 레스토랑이었다.
종업원이 금방 개고기를 가지고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의 등뼈 부분이 나왔는데 고기가 얼마나 연한지 포크를 가지고 고기의 껍질을 벗길 수 있을 정도였다. 매우 맛이 있었다. 사슴고 기와 맛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다음으로는 고기가 별로 붙어있지 않은 갈비부분이 나왔다. 역시 맛이 있었다. 게걸스럽게 먹던 안내원이 우리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맛있어요" 하고 물었 다.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서는 우리 안내원에게 "저 서양놈들이 자기들이 뭘 먹는지 알기나 하 고 있는기야요" 라고 묻자 안내원이 장난스럽게 "저놈들은 자기들이 노루고기를 먹고 있는 줄 알 아" 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했다. 안내원들은 예전에 독일인 부부가 이곳에서 개고기를 먹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독일인 남편 이 아내에게 요리에 사용된 것이 개고기란 말을 않고 있다가 뒤늦게 공항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공항 바닥에서 구역질을 하며 먹은 것을 토해 버리고 만 것이다.
요리를 위해 개를 잡을 때 제맛을 내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이에 관 한 생각은 가능한 하지 않기로 하였다. 안내원이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어치우는 속도는 그다음 개요리가 나오자 절정에 달했다. "이게 오늘 개고기 요리중 백미야요" 안내원이 계속 강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요리는 꼭 먹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운데 다리' 라고 불렀다. 우리 는 그게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술취한 북한인 하나가 가라오케 기계로 애국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닌가.
가운데 다리다음으로, 다음으로 탕요리가 나왔는데 매콤한 것이 매우 맛이 있었으나 이즈음 우리는 개고기만 계속해 서 먹는데 질리기 시작했다. 탕과 함께 작은 공기그릇에 붉은 죽같은 것이 함께 나왔는데 안내 원은 이것을 탕에 섞어 먹으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것은 개의 골을 재료로 만든 스프였 다. 이것을 다 먹어치우자 개 혓바닥 요리가 후식으로 나왔다. 어윈은 "우와 잘 먹었다" 며 튀어 나온 배를 두드렸다.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는 각국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것이 편지봉투 개봉칼, 의자 등 잡동사니 였으나 스탈린이 선물했다는 50년대식 방탄세단은 볼 만 했다.
전시관을 나와 얼어붙은 폭포가 있는 어떤 산에 올랐는데 한 바위 전면에 김일성의 초상이 그 려져 있었다. 무슨 유적지라는 곳도 가보았는데 이러한 곳 대부분은 한국전 당시 참화를 입었던 곳이었다.
안내원과 친해지면서 우리들은 정치를 소재로 점점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애초 우리 일행 3명에 안내원 둘을 딸려준 것은 자기들끼리 서로 감시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으나 그들은 혼자 남아 있을 때에도 그들의 당노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언행을 보였다. "하긴 사상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회에서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도 했으나 후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하는 바를 진실로 신념을 가지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 었다. 서구에 사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심각한 범죄, 빈곤, 에이즈, 창녀, 호모, 담배피우는 여자들이 없 는 세상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문, 잡지를 비롯하여 외부와 모든 정보가 차단되 어 있는 북한 주민들이 우리들이 보기에 비상식적인 생각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할지 도 모른다.
전승박물관을 여행일정에 넣을 것인지를 우리가 먼저 안내원에게 묻자 그는 약간 놀라는 눈치 였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전승박물관에 먼저 관심을 보인 서양 관광객들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문객으로서의 한국전에 대해 관심을 갖고 특히 이 부분에 대한 북한측 주장에 귀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전역 어디를 가나 방문객들은 한국전쟁에 관한 갖가지 유적, 기념비, 묘지, 기념관,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림과 우 표에까지.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40년전에만 마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는 현재까지 오래전 일어났던 전쟁에 관한 비즈니스가 성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방문한 곳 중 '혁명의 순교자 묘지' 라는 곳이 있었는데 82년에 완공된 이 묘 지는 북한 전역의 전쟁 희생자들을 이장해와 평양이 잘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그들의 대리석 흉 상과 실물크기의 동상들을 세워놓은 곳이었다. 이는 결코 돈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로서 경 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 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이와같이 45 년전에 있었던 전쟁의 기억들을 생생히 유지하려는 데에는 틀림없이 그만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 이다.
평양에 있는 전쟁박물관에서 우리는 역시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박물관 안내원으 로부터 전쟁에 관한 북한측 주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안내원이 통역을 해주었다) 그는 2시간이나 걸린 박물관 관람 내내 미리 암기한 듯한 내용을 막힘없이 들려주었는데 만일 그가 '위대하신 최고 지도자 김일성 장군' 과 '미제국주의 침략자' 라는 말 대신에 그냥 '김일성' 과 '미 국' 이란 단어를 썼더라면 관람시간이 1시간으로 족했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우리가 처음 안내받았던 곳은 전쟁중의 밀고 밀리는 상황을 불빛으로 표시해 놓은 커다란 한반도 지도가 있는 방이었다. 북한측은 6.25 전쟁이 미군의 기습 북침으로 시작된 전쟁 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에 온갖 무기를 퍼부은 후 평화롭게 농사를 짓 고 있는 북한을 기습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치밀하게 계획된 미군의 북침이 3.8 선 몇 마일 못 넘어 북한 농부들의 저항을 받아 멈추게 되고 북한의 반격으로 3일만인 수요 일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박물관에는 가장 먼저 서울에 입성한 소련제 T-34 탱크가 자 랑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전쟁에서의 승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자 박물관 안내원은 미소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게속해서 방에서 방을 따라 여러 전시관을 둘러보았는데 방마다에는 김일성이 적극적으로 전쟁 을 지휘하고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최소한 두개 정도씩은 걸려 있었으며 많은 곳은 4 개가 걸려있는 곳도 있었다.
이밖에도 한 영웅적인 북한 병사가 끊임없는 미군의 공격에도 불구, 트럭을 몰고 고립된 북한군 에 보급품을 전달한 이야기와 어떤 농부가 부서진 나무다리 앞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 는 인민군을 위해 나무를 등에 받치고 스스로 다리가 되어 그 위로 트럭들이 다리를 건너게 했다 는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미화되고 있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는 미군이 선량한 양민들이 있는 곳에 세균 폭탄을 사용 해 많은 이가 희생되었다는 등 비교적 그럴듯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지어낸 것이 명백한 터무니 없는 말들이었다.
평양의 '어린이 궁전'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재능있는 아이들이 방과후 과외활동과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했다. 이곳은 내가 북한에 와서 보아왔던 그간의 여러가지 모습들에 비해 격이 맞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의문을 갖고 안내원에게 이곳이 모든 어린 아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인지 아니면 일부 특권층 자녀만을 위한 곳인지 등 몇몇 질문을 해보았 으나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어린이 궁전은 큰 극장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10m가 넘는 다 이빙대가 구비된 실내수영장과 유리 엘리베이터 등 매우 잘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교실에 잠깐 들어가보니 조그만 어린 아이들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아코디언 등을 연주하고 있었다. 극 장으로 들어서자 수천명의 어린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었는데 순전히 외국 관광객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노래하고 연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매우 귀여웠으나 마치 서커스단에서 조련된 동물들이 연상 되었다. 판에 박힌 똑같은 미소를 얼굴에 각인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이 학대의 한 단편을 볼 수 있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안내원은 우리가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북한 관광을 적극 추천해 달라고 부탁 했으나 이러한 그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북한은 참으로 흥미있는 여행지로서 추천할만 하다고 생 각한다. 동구가 무너지기 전에 보였던 여러가지 전조를 북한에서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평양 거리는 그야말로 종이조각 하나없이 깨끗했다. 안내원은 무척이나 친절해서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북한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최근 남한과 일본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아들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러시아는 더이상 공산국가를 원조하지 않으며 중국도 점점 그렇게 될 것이 다. 구 소련과 동구 제국들이 무너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북한체제가 무너진다면 아예 흔 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 여러분들도 이 희안하고 이상한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 라지기 전에 한 번쯤 경혐해 보길 권한다.
이 글을 읽고 소감이나 의견교환을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특히 한국인 들은 더욱 반갑습니다.
cheers,
Paul & Rick Bak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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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1995 - Paul Bakker